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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심 ★
구조용 헬리콥터가 기운이 다해가는 그의 옆에 밧줄을 내렸지만, 윌리엄스 씨는 옆에 있는 스튜어디스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헬리콥터는 잠시 후 되돌아와 다시 밧줄을 내렸으나, 그는 또 다른 여성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중략) 윌리엄스 씨의 사후 그의 선행을 기려 사고현장 근처의 다리는 '아를랑 윌리엄스교'라고 개명되었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에 전세계가 감동했다. 나도 물론 감동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것은 영웅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친절심 문제이지 않았을까. 윌리엄스 씨는 자신이 아무리 쇠약해 있어도, 위기 상황에 있어도, 옆에 여성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하시죠, 나는 다음에도 괜찮으니" 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숭고함이 감해지는 건 아니지만. 
 
공감 ★
전에 호놀룰루의 할레쿨라니 호텔 수영장 근처의 레스토랑 'HWAK(House Without a key)'에서 아주 훌륭한 샐러드를 만났다. (중략)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HWAK의 메뉴에서 이 사랑스러운 샐러드가 사라져 그후로 나는 상당한 불편을 겪었다. 물론 나를 행복하게 해줄 목적으로 호텔이 운영되거나 세상이 돌아가는 건 아니어서 불평할 거리는 아니겠지만······.
 
클랙슨 속삭임 모드 ★
이런 것이 있으면 세상이 좀 더 편리해질 텐데 하고 늘 생각하지만 좀처럼 상품화·현실화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소음량 클랙슨. 좁은 도로를 달리다가 앞에 가는 보행자에게 '차가 갑니다'하고 가볍게 알리고 싶은데, 클랙슨을 울리면 깜짝 놀랄 것 같아 누를 수가 없다. 이럴 때 택시 운전기사는 아주 능숙하게 작은 소리로 "빵" 하고 클랙슨을 울린다. 나도 이따금 흉내를 내보지만 쉽지 않다. 전혀 울리지 않거나 혹은 "빠앙" 하는 큰 소리 탓에 보행자가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통상의 클랙슨 소리와는 별도로 '속삭임 모드' 같은 것이 핸들 옆에 붙어 있으면 편리하지 않을까.
참으로 하루키다운 다정한 발상이 아닌가요.
 
오믈렛을 만들자
요즘 거의 매일 아침 오믈렛을 만든다. 오래전부터 오믈렛을 확실하게 마스터하고싶다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아 시작하지 못했다. (중략) 그래서 한 달 정도 하다보니 점점 실력이 늘었다. 구운 색감도 예쁘고 속은 부드러우며 얌전하게 싼 오믈렛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왠지 오믈렛을 잘 만들고 싶다. 맛도 있고 퐁실퐁실하니 귀여우니까 ···
 
일단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런데 늘 희한하게 생각하는 것. 언제부터 소설가를 '작가님'이라 부르게 된 걸까? 옛날에는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채소가게 님' '생선가게님' 같은 느낌이다. 뭐 사운드면에서 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불릴 때면 이따금 "아, 예, 예. 어서 옵쇼" 하고 두 손을 비비며 나가야 할 것 같다.
 
옷의 철학
생각해보면 옷이라는 것은 소설가의 문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비판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것이 내 말이고 이것이 내 문체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해서 비로소 마음속 무언가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도, 세련된 표현도, 자신의 감각과 삶의 방식에 어울리지 않으면 그다지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물 잘 고르는 법
선물을 잘 고르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것인데, 선물을 고를 때 에고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옷은 내 마음에 드네'라든가 '이 옷을 그 사람한테 입혀보고 싶네'라는 식으로 자신의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잘 고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마음이 되어 물건을 고른다. 좀 노골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분명 선천적인 자질이 아니려나.
 
맥주
롤링 록, 바스 페일에일, 사무엘 애덤스 등. 나는 이 세 종류의 브랜드를 냉장고에 상비하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골라 마신다. 또 한 가지 내가 애호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이것은 병뿐만 아니라 캔으로도 판매되고 있지만, 블루리본. 특별히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맛이 담백하여 한낮에 편안히 마시기 좋다.
 
디테일
옛날에 볼보가 미국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그원인을 철저히 조사했더니 '컵홀더가 달려 있지 않아서'라는 이유뿐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은 편리가 의외로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겠죠.
 
건방진 소리
나이 먹는 것을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 가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는 한참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뭔가 좀 건방진 소리 같지만.
 
여행
요컨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은 예정에 없던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당초 계획대로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여행하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여행 갈 때마다 기억해보아야지
 
<가을>
기야마 쇼헤이의 <가을>(쇼와 8년)이라는 짧은 시가 있다.
새 나막신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마침 면도를 다 끝낸 참이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툭툭 차며 걸어갔다.
(중략)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이건 젊은 사람이 쓴 시군'이라고 느꼈다. 실제로 1933년에 기야마 쇼헤이는 아직 스물아홉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새 신발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집에 오는 상황은 그리고 그걸 예사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직 이십대의 것이니까.
나도 젊을 때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 유감스럽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야. 새 리복을 샀어" 하고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면 곤란할 것 같다. 예정된 스케줄도 있고 사정도 있을 테니.
고등학생 시절, 심야에 책상 앞에 앉아 공부(인지 뭔지)를 할 때, 누가 돌멩이로 창문을 두드려 밖을 내다보면 친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바닷가에 가서 모닥불 피우지 않을래?" 해서, 함께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상담
그래서 어느 때부터 상담을 하러 찾아와도 상대의 얘기를 듣기만 할 뿐 충고는 하지 않는다. 결론은 내리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게 되었다. 팔짱을 끼고 "음, 그렇군, 그거 참 힘들겠네. 여러 가지 일이 있었구나. 아하, 좀처럼 잘 안되는가 보군. 왜 그럴까?" 같은 맞장구를 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귀를기울이는 사이, 적당히 시간이 되면 얘기가 끝난다. 그러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변명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 사람 대부분은 실용적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맞장구를 원하는 게 아닐까? 오래 살며 이런저런 경험을 쌓다보니 점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바람아 불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의 마지막 한 줄, 옛날부터 왠지 이 문장에 몹시 끌렸다. Think of nothing things, think of wind. 내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이 문장을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이었다. nothing things 어감이 정말 좋다.
 
창작자들에게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낙관적인 쪽일지도 모른다. 소설가로서는 사람의 의식의 어두운 영역을 확실히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대체로 '뭐 어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세계관 하에 살고 있다. 만사를 깊이 생각하느라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일은 일단 없다.
소설가에게 또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이 낙관적이라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닌가, 늘 생각한다. 이를테면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갈 때는 "좋아, 이건 꼭 완성할 수 있어' 하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능력으로는 이걸 다 쓸 수 없을지도'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낙관적이라기보다 그저 뻔뻔스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악수
나와 그 사람은 포기하고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유의 인물에게 도리를 설교하는 것은 움직이는 불도저를 저지하는 것보다 어렵다. "미안합니다. 미국인이 모두 저렇진 않아요."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되먹지 못한 놈들은 많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하고 응수했다.
 
끔찍한 것과 비참한 것
'인생은 끔찍하거나 비참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영화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은 인생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뭔가 끔찍한 경우를 당했다면 오히려 안도해야 한다, 고 그는 진지하게 주장한다. '아아, 끔찍한 일 정도여서 다행이야. 비참한 일은 아니어서 살았네' 하고.
영화에서는 그 다음에 뭐가 끔찍하고(호러블하고), 뭐가 비참한가(미저러블한가) 하는 구체적인 정의가 계속되지만, 표현의 문제가 있어서 여기서는 그걸 인용할 수 없다. 관심있는 사람은 꼭 찾아 빌려 보시길.
(중략) 앨런의 인생에 대한 정의는 얼핏 보면 부정적인 것 같지만, 견해를 바꿔 보면 의외로 긍정적인 세계관이기도 하다. 적어도 실용적이기도 하고.
예를 들어 (일단 예를 들어 입니다만) 어느 날 신문 문화면을 펼쳤더니, '무라카미 씨에게는 작가로서의 재능이 조금도 없다. 머리는 원숭이보다 나쁘고 인격은 천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글이 있다 치자. 그런 기사가 전국 가정에 배달돼 읽힐 생각을 하면 나로서는 기가 막힌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도촬이라든가 데이트 폭력으로 체포되어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하는 데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부끄러워서 세상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무능하네 바보네 천박하네 하고 욕먹는 정도로 끝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범죄행위는 아니니 당당하게ㅡ 까지는 아니더라도, 뭐 자연스럽게 조용히 거리를 걸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선적이다'라고 비판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뇨, 나는 위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벌떡 일어나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못 그런다. 내 속에는 물론 위선적인 부분이 있고(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걸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위선적인 행위다.
 
열받고 열 받지 않고로
그런데 인터넷을 하다 이런 글을 보았다. 태어난 아이 이름을 '야자'라고 쓰고 '코코넛'이라고 읽고 싶다는 임신중인 여성의 글이었다. '그렇게 이름을 짓는다고 하니 남들이 비난해서 열받는다'라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식에게 자기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부모의 권리로, 이러니저러니 말을 거들 생각 전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으음, 열받고 열받지 않고로 간단히 세상을 이분해버리는 건 좀 ··· 하는 생각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