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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p. ★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쓰쿠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사키 님. 오우미 씨는 지금 업무 중이라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10분 정도면 된다고 합니다."
잘 훈련된 매끄러운 말투였다. 경어의 사용법이 정확했다. 그리고 기다리게 하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듯이 들렸다. 교육이 잘되어 있다. 또는 천성적인 것일까?
아마 천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게 다 커서는 교육으로 배울 수 없는 거니까. 아마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지 않을까?
368p. ★
"넌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 뿐이야. 변명하고는 달라."
나는 이렇게 언어에 민감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과 '변명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변명한다'고 이름 짓는 순간 그것은 변명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동진 평론가는 '어휘는 어휘만큼 그에 해당하는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말 그대로이다.
아래 영상의 10:2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이 재밌으니 전부 보시는 걸 추천.
https://www.youtube.com/watch?v=sy5bmlIEXzM
406p. ★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 쓰쿠루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게 새벽 4시에 나한테 전화해서 전하고 싶은 말인거네?"
"응."
"술 마셨어?"
"아니, 맨 정신이야."
"그렇구나. 이공계 사람치고는 아주 열정적이네."
이공계 사람치고는 아주 열정적이네. 하루키의 글을 읽다 보면, 이렇게 'ㅋㅋ'하고 짓게 되는 웃음이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고. 혹시 독자는 이 문장이 'ㅋ'만큼도 웃기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감...
표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짙은 구름으로 소용돌이치는 허무였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이었다.
17p.
"이야기가 딴 데로 샜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지는 것도 일종의 운동 실력이라는 거야."
김상욱 교수가 이야기한 '좋은 실수를 하는 법'이 떠오른다.
좋은 실수를 하는 방법
1. 실수를 숨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한테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숨기지 않는다.
2. 끝까지 제대로 실수한다.
실수가 진행될 때 숨기거나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모든 과정을 똑바로 마주 본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고, 또는 실수가 실수가 아닌데 섣불리 판단했을 수 있기에.
17p.
"창의력이란 사려 깊은 모방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한 말이에요."
"너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에요."
'윤사'였던가, '생윤'이었던가에서 배운 롤스의 시민불복종을 떠올리게 한다.
시민 불복종은 그것이 비록 법의 바깥 경계선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fidelity to law)의 한계 내에서 법에 대한 불복종을 나타내고 있다. 그 법을 어기긴 하지만 법에 대한 충실성은 그 행위의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인 성격과 그 행위의 법적인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에 의해 표현된다. - 롤스 『정의론』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또, 입시미술을 떠올리게한다.
내가 본 미술 실기 시험은 총 12컷의 공간에 그림을 그리도록 되어있다.
그 안에서 칸을 나누거나, 두 컷을 연결 지어 새로운 칸을 연결하거나하는 것은 유쾌한 시도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칸을 깡그리 무시하고 뒷 장의 여백에 그림을 그린다면 평가하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줄 것이다.
만약 꼭 뒷 장의 여백에 그려야겠다면, 합당한 근거가 필요하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뒷 장에 그려야만 했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큼 강력하게 납득시켜야 한다. (어차피 설명할 기회가 없다.)
틀을 깰 때에는, 확실히 섬세함과 센스가 필요하다. 교수님, 이 정도면 기분 나쁘지 않고 재미있죠? 하고.
비유
"난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도대체 얼마만 한 가치가 있을까?"
"멋진 질문이네요." 그러면서 하이다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마치 햇빛 속에서 졸면서 떠올리는 미소 같았다.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이다는 끊임 없이 사유하는 몽상가 캐릭터이다. 그런 사람은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어떤 웃음을 지을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정확한 비유다.
86p.
그는 커피에 아주 까다로워서 잘 볶은 향기로운 커피콩과 작은 전동식 커피 밀을 늘 가지고 왔다. 커피콩에 대한 집착이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 그가 누리는 유일한 사치였다.
100p.
미도리카와는 진정한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다.
(중략)
그런 비범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이다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없는 축복일까, 무거운 짐일까. 은총일까, 저주일까. 또는 그 모두를 동시에 포괄하는 것일까. 아무튼 미도리카와는 그리 행복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107p.
"아, 솔직히 말해 산다는 게 정말 귀찮아. 이대로 죽은들 요만큼도 섭섭하지 않아. 어떤 수단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목숨을 끊을 열정 같은 건 없지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할 수 있어."
277p.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편이 좋아. 나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하고 사라는 말했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간단하지만은 않을 터이다. 사람은 매일 움직이고 나날이 위치를 바꾸어 간다. 다음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294p.
"멀리서 온 것 치고는 짐이 별로 없네요."
"무거운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운전사는 웃었다. "누구든 무거운 짐은 싫어하죠. 그렇지만 어쩌다 보면 무거운 짐을 가득 끌어안게 됩니다. 그게 인생이니까. 세 라 비.(C'est la vie.)" 그리고 다시 즐겁게 웃었다.
'세 라 비'의 뜻이 궁금해서 검색해봤는데,
'그것이(C'est) 인생이다(la vie)' 라고.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고 한다.
아래는 어느 블로거의 글을 그대로 옮겼다.
그들이 세라비를 말할 때는 우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어깨 위로 올린 다음에 마치 근육을 풀 듯이 '으쌰 으쌰' 팔을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세라비, 세라비'를 외친다.
하는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을 때에 외치는 '세라비!' 는 '와! 정말 멋진 인생이다! 최고였어. 이것이 인생이지!' 라는 탄성의 세라비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일이 틀어져서 속상하고 억울하고 손해를 보았을 때에는 조용한 소리로 '세라비, 세라비...'라고 중얼거리는데, 그때는'힘을 내자, 인생이란 다 그런거지 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자.'라는 위로의 세라비가 되는 것이다.
자고로 '세 라 비'는 프랑스어라고 한다.
364p.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고3 때 국어 문학에 나온 소설. 양귀자 - '밤의일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상한 것은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당한 쪽의 편에서 팔자에 대해 한층 너그럽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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