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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연시연 2022. 10. 2. 19:25

돌격대 ★

그런 돌격대 이야기를 하면 나오코는 언제나 웃었다. 그녀가 웃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나도 그의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다소 고지식한 셋째 아들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도를 만드는 것만이 그의 자그마한 인생의 자그마한 꿈인 것이다. 누가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203p. ★

「그렇게 많은 여자들과 잔다면서 금욕적이라는 것은 이상하잖아요」 하고 나오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몇 여자와 잤다고 그랬지요?」 「거의 8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경우 상대한 여자의 수가 늘면 느는 만큼 하나하나의 행위가 갖는 뜻도 급속도로 희박해져. 그런데 그게 또 그가 원하는 거야.」 「그런 게 금욕적이라는 거예요?」 「그에겐 그래.」

 

227p. ★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향상이 되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요. 자기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불쌍해요, 그 사람.」

 

37p.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그때 내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아름다운 한 여인에 대해 생각했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는 무엇을 보든, 무엇을 느끼든,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나이였던 것이다.

 

39p.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글로 써보지 않고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40p.

「그건 정말─정말 깊단 말예요」 하고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정확한 어휘를 골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55p.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 였는데,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밖에는 믿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믿지 않는 다는 건 아니야. 다만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야. 인생은 짧아."

 

디테일

"나가자."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미도리와 함께 교실을 나왔다. 나올 때 얼굴이 둥근 녀석이 내게 뭔가 말했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95p.

··· "그 레스토랑에 전화를 할까 했지만 가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고, 자기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많이 기다렸어?"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남아도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한가해?"
"내 시간을 조금 줘서, 그동안 너를 잠자게 해주고 싶을 정도야."
미도리는 턱을 괸 채 생긋 웃고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자기는 참 친절해."
"친절한 게 아니고, 단순히 한가한 거야."하고 나는 말했다.

 

오이

나는 세면실에서 오이 세 개를 씻어 왔다. 그리고 접시에 간장을 조금 붓고, 김으로 오이를 감아 간장에 찍어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맛있는데요」

  김+오이+간장 맛있겠다!

 

207p. 감각적 묘사

나의 발걸음 소리가 흡사 바다 밑바닥을 걷고 있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처럼, 어딘지 전혀 방향이 다른 곳에서부터 둔하게 들려 왔다. 가끔 뒤쪽에서 바삭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밤 짐승들이 숨을 죽이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숲 속에 서려 있었다.

 

비유

그는 모차라트의 훌륭함에 대해서 조용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는 시골 사람들이 산길을 잘 알고 있듯이, 모차르트의 훌륭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423p.

「그 사람과 헤어졌어요, 깨끗이.」
미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말보로를 입에 물더니, 손으로 가려 성냥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어째서?」
하고 미도리는 소리를 질렀다. 「자기, 머리가 이상한 것 아냐? 영어의 가정법을 알고, 순열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를 읽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요 ? 어째서 그런 걸 여자에게 말하게 해요 ? 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뻔하잖아요. 」

  ㅋㅋㅋ마르크스를 읽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묻는 거지요?

 

427p.

「자기 이야기 좀 해줘요」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내 어떤 이야기?」
「글쎄 ······ 어떤 게 싫어요?」
「닭고기와 성병과 그리고 말이 많은 이발사가 싫어.」
「그 밖에?」
「4월의 고독한 밤과 레이스 달린 전화기 커버가 싫어.」
「그 밖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밖에 특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432p.

내가 나오코에 대해 느끼는 것은 무섭게 조용하고 부드럽고 맑은 애정이지만, 미도리에 대해선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서 걸어가고, 호흡하고, 고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뒤흔듭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몹시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440p.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이런 것이었다.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 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444p.

나의 기억 대부분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게 이어져 있었다. 

 

448p.

내가 레이코 여사를 만난 것은 10개월 만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걷고 있자니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따스해져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오코와 둘이서 도쿄 거리를 걸을 때도, 나는 이와 꼭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일찍이 나와 나오코가 기즈키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었듯이, 지금 나와 레이코 여사는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460p.

「와타나베 군이 만일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픔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면, 와타나베는 그 아픔을 앞으로 인생을 꾸려가는 동안 계속 간직하면 돼요. 만일 배울 것이 있다면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해져야 해요.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니까. 이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히거나 하면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러니 괴롭겠지만 좀 강해져요. 좀더 성장해서 어른이 돼야 해요. 난 와타나베에게 그 말을 하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 먼 길을 그 관(棺) 같은 전철을 타고서.」

 

462p.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인생의 슬픔이라든가 아름다움 같은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이 사람들이란 물론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그리고 조지 해리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