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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독후感] 여자 없는 남자들

연시연 2022. 7. 6. 00:27

독후感.


책 '여자 없는 남자들'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 개봉) 원작 소설이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먼저 영화를 사랑하는 내 친구의 추천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감상했다.
영화의 중심내용 (작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나 이를 외면한 주인공 남편, 외도를 눈치챈 듯 하였으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절망한다)이 작가 아내가 주인공 남편에게 성교 중에 들려주는 이야기(자극적이게도, 짝사랑하는 남자 아이의 집에 침입해 자위하는 여고생의 이야기. 이를 눈치챈 듯 하였으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짝사랑남을 보며 여고생은 절망한다).로 표현되는 알레고리적 요소가 꽤나 재미있었다. (이러한 알레고리는 이 영화의 처음~끝에서 상황을 전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ㅡ그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아니였지만ㅡ 작품의 영상미(도로의 야경, 빨간 차, 흰 눈 밭, 윤수씨 자택의 따뜻한 색감)나 배경음악(잔잔하면서도 특유의 발랄함과 웅장함. 아마도 드럼 하이햇 사운드)도 적잖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니, 원작 소설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1. 소설은 내가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예술이기에 2. 각색된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 소설을 읽어 비교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의 첫장을 넘겼다.
차례는 '드라이브 마이 카' 6, ' 예스터데이' 61, '독립기관' 115, '셰에라자드' 171, '기노' 215, '사랑하는 잠자' 273, '여자 없는 남자들' 313로 총 7개 단편으로 구성되었다.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아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대작가스러이, 담백한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완독 후에,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이 있다. 먼저 슬픈 소식은, 앞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 했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미처 표현되지 못한 원작소설의 미점 같은 것들을 예리한 핀셋처럼 뽑아내 독자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하찮게도ㅡ영화에서는 빨간 차였던 것이 원작에서는 노란 차였다ㅡ 그리고 ㅡ영화는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 뿐만 아니라 <셰에라자드>, <기노> 까지 3개의 단편을 짬뽕하여 각색된 것이었다ㅡ 정도 뿐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보다는' 재미 없었으니 '소설을 영화로 잘 각색하는 법'을 공부하는 게 아닌 이상 그닥 추천드리지 않는다 ...
그러나 기쁜 소식, <기노>와 <독립기관>을 무지 재밌게 읽었다. 의외의 수확이다. 동네서 맛있는 파스타를 먹으러 갔다가 뜻 밖에 게살크로켓(사이드메뉴) 맛집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이번 독후감에서는 요 두 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테니 따라와보시라. 웰컴 투 더 하루키 월드.


독립기관
줄거리
주인공 도카이는 쉰 두살, 직업은 성형외과 의사이다. 동시에 두세 명의 걸프렌드와 엔조이하는 것이 그의 취미이다. 그러나 그가 외모가 뛰어난 여자를 밝힌다거나 성적인 것을 지극히 좋아해서는 아니다. (*본문 : 섹스는 어디까지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또하나의즐거움'일 뿐.) 그가 원하는 것은 매력적인 여자들과의 '친밀하고 지적인' 교류였다. 그러던 중 여느 때처럼 엔조이를 위해 만난 여자에게 도카이는, 뜻하지 않게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유부녀였던 이 여자는 도카이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제 3의 남자와 외도를 하게 되고... 그 충격과 상사병 비슷한 것으로 도카이는 곡기를 끊고 굶주림에 허덕이며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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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무리 가슴 절절한 것이라지만, 사랑 때문에 음식을 넘기지 못하게 되어 급기야 목숨까지 잃다니, 희한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애초에 '엔조이'가 취미인 주인공은 또 뭔가. 동시에 여러명의 애인을 만드는 것이, 그것도 임자 있는 유부녀들인데... '이거 잘못된 거 아니야?' 싶으면서도 읽다보니 작가의 뻔뻔한 이야기 전개에 '뭐.. 역시 그럴 수 있나. 일본이니까.'라고 묘하게 설득 당하더라. 역시 하루키는 매우 4차원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각설하고, 내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책의 중간에 주인공 도카이가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몰두하게 되는 부분이다.

"성형외과 의사의 기술과 신용을 빼고 맨몸뚱이로 아우슈비츠에 내던져진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 ㅡ처음으로 진실된 사랑에 빠졌다ㅡ라는 책의 중심내용과, 이러한 철학적인 자아성찰이 대체 무슨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사랑의 '초월성'에 집중해보면 되겠다. 사랑이 이성을 초월하고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견해에는 (적어도 당신이 사랑해봤다면.) 웬만한 독자들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인간의 원초적이고 숭고한 욕망이다. 도카이는 이 원초적이고 숭고한 욕망을 처음으로 통렬히 느끼고 나서, (극단적으로 말하겠다) 성형외과 의사의 기술과 명예 따위의 우주 차원에서 본다면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원초적인 것에 반대됨)에 무상함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굳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같은 거창한 가정을 들고와 원초적인 입장에서 도카이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실은 사랑하는 행위로부터 '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기까지 사색의 흐름은 더욱 복잡하고 디테일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필자가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꼭 직접 읽어보시고 '느껴'보시길.

또한 독자는 줄거리만 읽었을 때에 어째서 제목이 '독립기관'인지 궁금할 수 있다.
책에서 화자는 도카이가 아닌 제3자인데, 그는 도카이의 행보를 보며 이렇게 서술한다.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작용이었다."
학문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몸에 사랑하는 독립기관 같은 것은 없다는 건 나 같은 예체능 쟁이도 다 아는 사실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이과쟁이에게 "나, 내 몸의 독립기관을 사용해 사랑하고 있어."라고 하면 기절초풍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키는 이성을 초월하는 무언가(예를 들어 사랑)를 마치 실재하는 독립기관인 양 비유했고, 이에 경의를 표한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에 비유. 반어적 표현 Irony 을 사용하여 하루키가 말하고 싶었던 사랑의 초월성과 비실재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실로 적절한 비유였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리고 하루키의 철학이 엿보이는 구절 하나를 보여드리고 다음, <기노>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 .

 


기노
줄거리
스포츠용품 판매회사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기노는, 그가 회사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 자신의 아내가 집에서 격렬하게 섹스하는 장면을 잔인하게도 눈 앞에서 목격한다. 곧바로 기노는 아내가 있는 집을 떠나고 회사에 사직서를 낸 뒤 아오야마 작은 골목에 자신의 이름을 딴 술집을 차린다.꼬리가 아름다운 회색 길고양이가 '기노'의 첫번째 손님이었고, 이후에는 민머리 젊은 사내 '가미타'가 가게에 찾아와 책을 읽기 시작한다. 회색 길고양이와 손님 가미타는 가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문득 회색 고양이는 사라지고, 뱀들이 예사롭지 않게 가게를 감싼다. 가미타가 찾아와 가게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나라며 기노를 채근한다. 그의 말을 따라 혼자 여행하던 중(여행이라기보다, 무기력하게 방황하던 터), 그는 자신이 아내의 외도, 회사 동료의 배신 등에 상처받지 않은 듯 살아왔으나, 실은 모든 상처를 '외면'하고 진실을 '회피'했던 것임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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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상처를 감추고 진실에 맞서길 회피한 경험이 있는가. 행복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까먹고. 고통, 분노, 실망, 체념 따위의 감정에 무감각해지는 때가 있었는가.
나는 살짝 비슷하게나마 있었다. 기노 이야기는 나의 한 때를 떠올리게 했다. 사랑하고 이별하면서 겪는 아픔을 일찍이 걱정하여 미리 정을 주지 않던 한 때가 있다. 내 안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를 만들어 놓았던 것 같다. 이렇게 꽁한 인간의 연애가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아니, 사랑이라는 형태로 발전할 수나 있겠는가. 결국 사랑 없는 적당한 즐거움과 짧고 얕은 만남들이 나에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만을 떠안겨 주었다. 이러한 경험이 주인공 기노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물론 상처의 크기가 기노에 비할 수 없지만) 소설에 더욱 이입되었다. 당신도 나처럼 기노와 조금이나마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표현력에 백번 감탄하고 공감할 것이다.
한 번은 작가가 기노가 느끼는 공허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따금 저 자신이 반쯤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막 잡은 오징어처럼 내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것 말고는 그럭저럭 건강합니다." . . .
와.. 어떻게 막 잡은 오징어를 떠올리고 비유했을까. 하루키의 뇌 속에는 아마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사막도 있고 오만 생물과 사물이 다 사는가 보다. 꼭 한 번은 그의 뇌 속을 열기구 타고 유람하고 싶다는 염원이 생긴다.

또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표현법은 책 전반에서 나타나는 주인공 '기노'와 '뱀' 간의 알레고리다.
책에서, 뱀은 누가 제 목숨을 노릴 때를 대비해서 심장을 은신처에 따로 감춰둔다. 고 이야기한다.
'뱀'은 '기노'를 상징하고, '뱀이 심장을 감추는 행위'는 '기노가 상처를 외면하는 행위'를 상징하며, '은신처'는 '그의 술집'을 상징한다.
이야기 초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기노'라는 골목 안쪽의 작은 술집이 그 구체적인 장소가 되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기노라는 뱀이 술집이라는 은신처에 심장을 숨겨놓았다는 결론의 힌트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

나는 왠지 샤를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 Enivrez-vous - Charles Baudelaire 를 상호텍스트적 맥락에서 이 소설에 대입하고 싶다. (글이 길어져 시를 따로 첨부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려고 하니 궁금하면 검색하여 읽어보시라. 좋은 시다.)
어쩌면 '기노'에서 상처 받을 때 상처 받아야 한다는 말은 시에서 취해있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인생은 항상 '진심'껏 취해 있어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도 취해야하지만 슬픈 마음으로도 취해야 한다.
주인공 기노가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고, 결국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된 것이, 그가 겁이 나서 충분히 취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독자 대부분이 두 작품을 모두 읽지 않았을 텐데, 내가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혼자 지껄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


단편 <독립기관>과 <기노>의 줄거리, 그리고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는데, 어떻게 흥미가 조금 생겼는가?
책 '여자 없는 남자들'을 모티프로 삼은 이 소설집에는 말 그대로 연인이나 아내로서의 여성이 부재하거나 상실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아내를 병으로 사별했고, '기노'에서는 외도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했다. '독립기관'에서는 유부녀에 사랑에 빠지나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하루키는 이러한 소재에 공허함과 씁쓸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가치도 담아냈다. 그는 아마 낭만과 진정성이 있는 사람이리라. 그가 사랑에 대해, 진심에 대해, 공허함에 대해 계속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족족 와닿았다.
동시에 하루키는 변태스러운 사람이다. 7개의 단편이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섹스가 빠지는 소설이 없어 읽는 내내 당혹스러움이 잇따랐다. 심지어 <사랑하는 잠자> 에서는 소설 '변신'을 오마주하여, 주인공이 반대로 바퀴벌레에서 사람이 되는 설정인데, 곱추인 여자 수리공에게 사랑에 빠져 그녀 앞에서 딱딱하게 발기되는 장면이 있다. 역시나 그의 변태스러움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부분마저 새롭게 다가와 재밌었다.
앞서 설명드린 <독립기관>과 <기노> 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모두 진진하니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다음 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들고 찾아오겠다.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