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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할머니맥주. 유명한 프랜차이즈 맥주집. 오목교역에 있는 작은 매장이 우습지만 내 직장이라면 직장이다.
오래도 일했다. 지인들에게서 날 괴롭히는 나쁜 진상 손님이 없냐는 질문을 꽤나 받았다.
한마디로 답하자면 없다. 이정도면 클린하지 싶다. 술집에서 일한다고 얘기할 때 걱정하여 물어준 모두에게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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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간혹 이상한 사람들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역전 내부에서는 유명한 단소 할아버지 - 한 손에는 단소를 들고 자전거 끌면서 가게 앞을 서성이신다.
목적은 모르겠지만 가게를 바라보면서 항상 웃고계시는 게 참 보기 좋.
지는 않고 섬뜩하니 무서웠다. (같이 일하는 언니가 저 사람 모르냐고 눈 마주치지 말라고 하더라.)
이는 앞서 유명한 7호선 단소살인마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무기를 바꿀 줄 아신다.
어느 날은 단소가 아닌 후레쉬를 들고 가게 안을 깜빡깜빡 조지길래 진짜 깜짝깜짝 놀랐다...
당시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재밌었는데, 요즘은 안보이시니 또 서운하다.
그 밖에 무턱대고 들어와서 장미꽃을 파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무엇이 맘에 안들었는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저 알바생이 일을 안한다,고 사장님께 모함하는, 신기한 청년도 있었더랬다.

나는 불과 며칠전, 나의 '역전이상한손님컬렉션'에 들어갈 새로운 인물을 발견했다.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다. 내가 출근한 오후 11시 경, 혼자 들어와 앉으시더니 바지락탕, 짜파구리, 한치 그리고 참이슬 한 병을 시키시더라.
젊은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이 맥주집에는 혼술하는 손님이 거의 없다.
또한 혼자 먹을 수 있는 주문량이 아니었기에 그녀에게 일행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퀭한 눈과 탁한 피부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어쩌면 혼술손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과 함께 잔을 세팅해드려야했고 몇 개의 소주잔이 필요하신 지 알아야했는데
혹시라도 혼술손님이실 때에 그녀가 머쓱하지 않을 수 있는 워딩을 5초정도 고민했다.
일행 분 있으세요? 아니 없어요. 없다고 말씀하시기 뭐하지 않을까.
소주 잔은 몇 잔 드릴까요. 1잔이에요. 1잔이라고 말하기 머쓱하시지 않을까.
오케이 정했다. 나는 일단 테이블에 잔 1개를 내려놓으면서, "소주잔은 1개면 괜찮으시죠?" 라고 물었고
그녀는 괜찮다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혼술손님이 맞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이상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도 아아주 가끔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그녀가 이상했던 건, 간혹 있는 혼술손님이라면 유튜브나 드라마라도 시청하기 마련인데, 휴대폰을 일절 안봤다.
한치를 잘라먹을 수 있는 가위와 집게를 세팅해드렸음에도 불구
눈치따위 보지 않겠다는 듯 한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비꼼 전혀 없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음식을 먹지 않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동동 튕기는 정도의 행위를 제외하고는 허공만 바라봤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그녀는 매장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이상하게 춤도 췄다.
그녀는 또 메뉴를 시켰고 또 술을 시켰다. 춤을 췄다. 그리고 또 물을 시키고 또 술을 시켰다. 춤을 췄다.
그녀는 그렇게 내가 가게를 마감하고 퇴근하는 새벽 5시까지 마시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상한 여자였다.
일하느라 녹초가 된 매니저님과 나는 그녀가 주문한 시간이 찍힌 포스기를 바라보며, "5-6시간 동안 혼자 마신건가. 대단하네."하고 허허 웃었다.

날이 밝을랑 말랑 하는 새벽 5시, 하늘이 채도 낮게 파랗다. 퇴근 후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역전 근처에 있는 24시간 카페에 앉아 이상한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했다.
"와.. 미쳤다"는 말이 육성으로 나왔다. 집에는 안들어가시나? 놀랍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 여성을 보고 느낀 감정은 이질감에서 오는 혐오도 아니고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꼬 하는 뻔한 동정도 아니고 공감 비슷한 납득이였다. 그러려니.
더 어렸을 때라면 이해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살아보니 미치지 않고 정상적이게 살기도 참 어려운 세상이다.

돈을 버는 것도 어렵고 돈을 잘 쓰는 것도 어렵다. / 일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을 잘 마무리하고 나오는 건 더 어렵다. / 인간관계 동료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편한 줄 알았던 가족관계는 제일 어렵다. / 연애도 애틋만 하면 좋겠는데 어렵다.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 그 이후 뭐 하나 쉽다고 빼놓을 것이 없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데, 과연 좋아한다고 쉬울까. / 매일 씻고 침대에 눕는 것도 어렵고 / 그냥 곤히 잠들기도 어려운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우리가 (가끔은 실패하지만) 알게모르게 해내고 있는 어려운 것들이 참 많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게다가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 쯤, 말 못할 사연 하나씩은 품게 되지 않는가. 그걸 이겨내는 것도 무척이나 ...


이제는, 인간을 무수한 전기회로를 가진 거대한 기계에 비유해보겠다.
위에 내가 나열한 것들(삶을 구성하는 많은 어려운 것들)은 기계가 가진 무수한 회로이고 인생은 전기가 흐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자.
전기가 흐르는 과정에서 회로의 훼손이나 변형등의 이유로 전기가 과하게 흐르는 경우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인간관계 회로에 심각한 훼손이 생긴다면.)
보통의 경우 바로 폭발해버리는 대신에 퓨즈가 나가버릴 것이다.
퓨즈는 회로의 훼손이나 변형 등의 이유로 과하게 전류가 흐르면 손상됨으로써, 전기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미쳐버린 사람들은, 퓨즈가 나가버린 기계 같다.
간신히 폭발하지 않은 기계.
유튜브나 뉴스만 봐도 그런 사람들이 참 많지 않은가.
역전의 혼술손님같은 경우 알바생인 나를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친절하고 정상적이었기에
원래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이 기계에 어떤 훼손이 가해졌는가 하는 일말의 안타까움도 있었고
앞서 말했듯 '중년' 여성이었기에
꽤나 오래된 기계일수록 고장나지 않고 버티는 것도 어렵겠다. 라는 이해심이 발동했다.
어려운 일이 너무 많은, 미치지 않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지. 맞지.



글의 사고가 너무 비관적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 분위기 전환을 해보겠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살이가 미치지 않고서는 힘들다고 말할 만큼 어렵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이 굉장히 기특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 대상이 없어 필자의 인생을 들려주자면,
공부가 하기 싫었지만 어찌됐든 초중고를 무사히 졸업했고 (매일 아침 일어나 등교하는 거 그거 어려운거지?)
상대방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려고 매 순간 눈치 보고 고생했지만 덕분에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남았다.
용돈 없이 알바하는게 어려웠지만 언젠가는 배워야할 혼자 벌고 혼자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많이 미숙하더라도 말이다.
중학생 시절 첫사랑과의 이별 후에는 민망하게도 매우 힘들었지만 이별 뒤에야 사랑을 알았고 그 감정에 있어 더욱 깊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위처럼, 어려운 일로 가득했기에 스스로에게 칭찬해줄 일도 얻은 것도 한가득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분명 칭찬할 일이 한가득일테니 한 번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정말 수고가 많았다.


필자 본인이 글을 쓰면서, 잘 살아왔다며 현실에 안주만 하기보다는, 조금이나마 성장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으로 다짐 비슷한 것을 해야겠다.
앞으로 세상 살아가면서 닥칠 많은 고난에 나 또한 미치는 것 아닌가 실은 두렵지만, 조금 더 용감하고 유쾌하게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을 해내는 여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재밌는 여정. 아니어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그리고 살자. 가능하다면 맨정신으로, 건강한 선택을 하면서 말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도, 단소 할아버지도, 혼술손님도, 미치지 않고서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꼭 미치지 않고 잘 살아가길 바란다.
독자는 멋쩍더라도 스스로에게 칭찬을 많이 하고 미래를 너무 두려워 마라. 삶을 소중하게 보듬어주기도 하여라.
무슨 sns에서 유행하는, 표지 예쁜 힐링 에세이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며 이 글을 마치게 되어 아쉽지만,
이 응원은 진심이다. 오늘도 긴 글을 읽어주셔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