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35p. _드라이브 마이 카
"자네는 친구가 있나?" 가후쿠가 물었다.
미사키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저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가후쿠는 잠깐 눈을 붙여보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차가 조금씩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그녀는 그때마다 꼼꼼하게 기어를 바꿨다. 옆 차선의 트레일러가 커다란 숙명의 그림자처럼 사브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었다.
67p. _예스터데이
나는 설명했다. 누가 출생지를 물었을 때 아시야라고 대답하면 아무래도 유복한 집 자식이라는 이미지를 주게 된다. 그러나 똑같은 아시야라도 실상은 각양각색이다. 우리집은 딱히 유복하지 않다. 아버지는 제약회사에 다니고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집도 작고, 차는 크림색 도요타 코롤라다. 그래서 누가 출생지를 물으면 쓸데없는 선입견을 주지 않도록 항상 '고베 근처'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비유 _예스터데이
굳이 단점을 들자면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가녀려서 '이 남자는 개성이나 자기주장이 좀 부족하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일단 입을 벌렸다 하면 그런 첫인상은 씩씩한 레브라도 레트리버에게 짓밟힌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진다.
디테일 _예스터데이
진주를 잠시 한 알 한 알 손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아직 제자리에 잘 달려 있는지 확인하듯이.
132p. _독립기관
"다나무라 씨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있습니까?"
166p. _독립기관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상처받거나, 그녀들의 평안한 잠이 방해받거나 하는 일은ㅡ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ㅡ 일어나지 않는다.
169p. ★ _독립기관
생각건대 그 여자가 (아마도)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의미는 얼마간 다르겠지만,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타율적인 작용이었다. 제삼자가 나중에야 뭘 좀 아는 척 왈가왈부하고 자못 서글프게 고개를 내젓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이성을 초월하는 무언가(예를 들어 사랑)를 마치 실재하는 신체의 독립기관인 양 비유한 것이 인상 깊다.
226p. ★ _기노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고통이나 분노, 실망, 체념, 그런 감각도 뭔가 또렷하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265p. _기노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표현 _사랑하는 잠자
몸 한가운데 진공 상태의 동굴이 생긴 것 같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고 근육이 비틀리고 내장이 여기저기서 경련을 일으켰다.
심한 공복감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가 아니라.
표현 _여자 없는 남자들
유려하기 짝이 없는 각종 현악기, 산뜻하게 떠오르는 목관악기, 약음기를 붙인 금관악기,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하프 소리, 절대로 무너지는 일 없는 차밍한 멜로디, 설탕과자처럼 착 감기는 하모니, 적당하게 에코를 살린 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