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품격 (삶이 곧 하나의 문장이다)│이기주
45p.
첫 문장에 대한 두려움은 있는 힘을 다해 싸우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품고 지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일부로 여기면서 말이다.
199p.
"안녕하세요. 사장님. 피아노 치세요?"
"최근에 배우기 시작했어. 피아노 배우는 게 꿈이었을 때가 있었거든. 어릴 때 피아노 치는 애들이 참 부러웠어."
"아, 피아니스트 되고 싶으셨나 봐요?"
"아니, 피아니스트 말고 그냥 피아노 배우는 게 꿈이었다니까. 만날 생각만 하다가 엊그제 학원에 등록 했어."
"예, 피아노 배우는 일..."
"모퉁이 돌면 피아노 학원 하나 있잖아. 얼마 전부터 다니고 있는데, 손가락이 건반에 착착 달라붙는 게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
166p.
'마지막'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굳이 소리 내 발음하지 않아도 괜히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단어이다.
244p.
"한창 잘나갈 때는 이 길과 저 길이 다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은 길만 가려 했죠. 나중에 불행을 겪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실은 삶의 모든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186p.
'시칠리아의 암소' 이야기
때는 바야흐로 기원전 6세기 시칠리아섬.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청동으로 만든 소에서 구슬픈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밤마다 온 나라를 휘감은 피리 소리는 멀리 있는 사람에겐 처연하게 들렸고, 소리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처절하게 들렸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참주였던 팔라리스는 권좌를 지키기 위해 소 모양의 형틀에 정적을 가둬 화형에 처했다. 소의 콧구멍에는 피리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형틀에 갇힌 자의 비명과 절규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권력에 눈 먼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시칠리아의 암소' 이야기다.
내면에 폭력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사례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에게는 조금 다르게 읽혔던 것 같다.
그는 시를 쓰는 사람의 고통과 형틀에 갇힌 사람이 겪는 고초가 비슷하다고 여겼다. 시인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삶의 비애와 아픔이 손과 입술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음악으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작에는 필연적으로 산고가 뒤따른다. 시인과 화가와 작가는 풍경과 사물과 현상뿐만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는 아픔까지도 창작의 재료로 사용한다.
88p.
한글은 섬세하다. 섬세한 건 예민하다. 점 하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뜻이 돌변한다.
무제
몇마디 대답으로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또한 온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7p.
<장자>에 나오는 '빈 배'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
https://blog.daum.net/winsys777/1039
빈 배(虛舟) / 장자(莊子)
빈 배(虛舟) / 장자(莊子)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
blog.daum.net
빈 배 이야기. 화의 근본을 다스려라...
57p.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 법이다.
공감
이런 궁금증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날이면 내가 질문을 품는 게 아니라, 질문들이 자기끼리 시끌벅적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04p.
"우리는 공간을 채우느라 공간을 잃는다"
-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